홍당무
「홍당무는 엉덩이를 살짝 들고는 거미의 동정을 살핀다. 결말을 예측할 수 없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는 판이다. 마침내 이 비극을 자아내는 거미가 덮쳐들어 별 모양의 다리를 오그려서 먹이를 죄기 시작하자, 홍당무는 마치 자기도 그 몫을 바라는 것처럼 벌떡 일어선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다. 거미는 다시 위로 되돌아갔다. 홍당무도 자기 자신 속으로, 또 자기 넋으로 되돌아간다. 그곳은 마치 토끼가 살고 있는 것 같은, 어두컴컴한 곳이다. 이윽고 모래를 품어서 무거워진 한줄기의 냇물처럼 그칠 줄 모르는 홍당무의 공상은 경사진 곳이 사라지자, 물결이 멈추어 물웅덩이를 이루면서 멈추고 만다.」- 본문 중에서
1864년 중부 프랑스의 샬롱에서 태어난 쥘 르나르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인 <홍당무>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지만, 어린 시절에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여 느꼈던 비참한 애정결핍은 평생동안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머리카락이 붉고 얼굴에 주근깨가 많아서 이름 대신에 홍당무라 불리는 한 소년의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홍당무>다. 르삑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홍당무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어머니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저자는 자신의 소년 시절을 풍자하면서 억눌린 감정을 토해내고 싶었을까.
집안에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싫은 내색은커녕, 가족으로부터 특히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면서 꿋꿋하게 생활하는 홍당무의 모습은 씁쓸함을 자아냈다. 가족과의 소통이 구석구석 막힌 하수관처럼 영 미덥잖은 부분이 많았다. 홍당무와 어머니의 관계가 어떠한 상황에 직면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어났으리라 짐작되는 크고 작은 문제를 일일이 열거하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느낀다. 이 책은 부모와 자식 간의 신뢰감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암시한다. 저자가 자신의 유년시절을 소재로 삼아서 홍당무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켰다는 점, 어머니가 미워할 수밖에 없는 못난 얼굴을 내세워서 불행했던 자신의 유년시절을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홍당무를 향한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에 실망한 아버지는 홍당무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못한다. 이 또한 자신의 고통을 곁에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던 가족을 향한 설움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싶다.
「"엄마가 그렇게도 무섭니?" 대부가 묻는다. 그렇다기보다 엄마한테는 그다지 내가 무섭지 않나봐요. 형은 엄마가 때릴려고 하면, 빗자루의 손잡이에 올라타고 엄마 앞에서 버티는 거예요. 그러면 엄마는 손도 못 쓰고 그것으로 끝나죠. 그러니까 엄마는 형에게는 정으로 대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신 거죠. 엄마도 말해요. 펠릭스는 성격이 너무 민감해서 때려서는 안 된다고요. 홍당무는 그야말로 몽둥이 체질이지만 하고 말예요.」- 본문 중에서
아무도 없는 헛간에서 거미 한 마리를 만나게 된 홍당무, 천장의 거미줄에 날벌레 한 마리가 걸려서 퍼덕거리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날벌레를 향해 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거미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기다란 침묵과 함께 공상에 빠지는 홍당무… 그 언젠가 나도 거미줄에 걸린 귀뚜라미 한 마리를 목격한 적이 있었다. 거미는 집요하게 먹이를 죄기 시작했다. 바등거리며 벗어나려는 귀뚜라미의 숨통마저 돌돌 말아버리는 거미… 홍당무는 거미의 동정을 숨 죽이며 지켜 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 저자 쥘 르나르의 정신 세계가 그려낸 홍당무의 자아상, 그것은 내가 허공 속 거미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과 일치했다. 홍당무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의 진실된 사랑이었다.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통해서 '아동 학대', '방임'이라는 문제를 조심스럽게 끄집어내서 우리로 하여금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라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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