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아서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따로 없었던 것 같다. 일상 그 자체가 글감이요, 한 편의 글이었다. 그래서 주어진 몸뚱어리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글로 표현했다. 어떤 갈망이나 애처로움에 대한 회상도 아니었다. 산다는 것에 대한 감상문도 아니며, 그저 이 세상에 내던져진 하나의 존재로서 끊임없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어떻게 변화하여 성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나의 오감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는 행위가 바로 '글쓰기'였던 것이다.
정신으로 빚어낸 나의 창조물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시간이란
어떤 사람이 한 편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능력은 정해진 것이 없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 수준과 기대에 따라 글을 이해하며 읽을 것이다. 그리고 정신이 갖춘 차원에 의해 글을 해석하고 흡수하게 될 것이다. 말인즉, 세상 모든 글은 어느 누구의 욕망도 충족시킬 수 없으며, 고로 오직 글이 모든 현상의 기준은 될 수 없다. 글은 자신을 쓴 사람과 읽을 사람을 알아챌 것이다. 언젠가 나는 '글이 나를 유혹한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오직 '글'에 사로잡혀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다시 '내가 글을 장악했다.'라는 느낌이 든 적도 있었다. 유혹과 장악을 넘나들면서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이 글쓰기로 시작되고 있음이었다.
글쓰기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엿보다가
《글쓰기의 공중부양》은 이외수의 글쓰기에 대한 내공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글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글에 대한 진리'가 이외수의 독특한 문체로 날카롭게 적혀있었다. 쉽게 말해서 이외수가 말하는 글쓰기란, '모든 것을 초월하되, 자기 자신에 대한 우월감을 내려놓아야 진짜 글쓰기가 시작된다.'와 같은 것이다. 글은 내가 아는 것에 대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발견의 기록이 되어야 한다. 그 발견이 비록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기록'한다는 자체가 이미 놀라운 변화임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글쓰기가 그대의 외형을 아름답게 만들어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대의 내면은 아름답게 만들어 줄 수가 있다. 그대의 능력에 따라 독자들의 내면까지 아름답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세상 만물은 모두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세상 만물의 이름 또한 모두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아직도 육안이나 뇌안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면 어찌 세상 만물을 사랑하는 영혼을 가질 수 있으랴.」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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