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얼룩으로 물든 헌책을 찾아서
배고픈 청춘은 언제나 헌책방의 단골손님이었다. 청춘은 빵 하나와 헌책을 맞바꿀 정도로 책벌레였다. 그곳은 남녀노소 고루 물든 정다운 공간이었으며, 인생에 대한 철학이 샘솟는 미지의 세계와 같았다. 내가 제일 처음 구입한 헌책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삶의 철학을 알려준 어린 왕자를 만나 '책 한 권이 선사한 축복과 기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헌책을 읽다 보면 듬성듬성 이름 모를 손과 입술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그 누군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적었을 연애편지, 혹 소중한 인연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려 했던 수줍은 마음도 발견하게 된다. 책장에 깨알같이, 또박또박, 휘갈겨 쓴 손글씨를. 누군가는 자신을 엄하게 꾸짖고, 현실에 대한 허망함을 토로하기도 했으며, 황급히 받아적은 전화번호와 이름이 선명하게 남아있기도 했다.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면, 나는 무어라 말할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그동안 헌책을 수집하면서 발견한 일명 '헌책을 물들인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냈다. 처음 책을 구입한 '책주인'이 적어놓은 손글씨를 모아보니, 제법 그럴싸한 한 편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이 살던 시대와 세상 속 이야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랄까. 서로 다른 모습, 생각으로 살아갔을지라도 그들이 지향했던 시대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음도 어렴풋이 보였다.
책을 읽으면서, 책을 전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나 역시 책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을 휘갈겨 적어놓는다. 번뜩이는 상상력으로 즉흥적인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듬성듬성 메모를 남겨둔 책이 나의 손을 떠나면, 필히 누군가의 손에 다시 쥐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나의 글을 읽게 될 터이니, 그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가슴이 짠해지려고 한다. 내가 미처 토해내지 못했던 응어리를, 누군가가 말없이 받아줄 것이라는 안도감과 고마움이 교차하기도 한다. 이렇게 무언의 행위로 나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축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의 저자는 헌책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 추적하여, 책의 주인을 만난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이 이렇게 인연이 되어 만나 '책과 삶'을 논할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짧은 명상에 잠겨보련다.
'서령의 서재 > 서령의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린왕자의 사람을 사랑하는 법> : 어린 왕자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 (0) | 2013.10.09 |
---|---|
<난, 감동이 필요해> : 진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0) | 2013.10.08 |
<글쓰기의 공중부양> : 나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0) | 2013.10.07 |
<초간단 생활놀이> : 부모와 아이를 묶어주는 '놀이'의 힘이란 (0) | 2013.10.07 |
<포기하는 용기> : 포기하는 자의 아름다움이란 (0) | 2013.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