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령의 서재/서령의 리뷰

<설국>

글쓰는서령 2011. 8. 9. 10:11

 


설국(세계문학전집 61)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9-01-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요코미쓰 리이치 등과 감각적이고 주관적으로 재창조된 새로운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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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백색의 세계로 진입한 시마무라. 밑바닥부터 세상 끝까지 흔들리는 열차에 몸을 싣고 설국을 향해 나아간다. 그곳은 찬란히 빛나는 무형무색의 본고장이었다. 자신과의 영적인 교감을 음미하면서 창백하디 건조한 차창밖을 내다보다가 한 여인과 눈이 마주친다. 빛의 반사가 그와 여인의 오묘한 만남을 제공한 것이다. 창문에 비친 그녀는 몸이 불편한 남자를 정성껏 간호하고 있다. 인간이 은밀하게 관찰하는 인간의 모습이란 무엇인가…… 나는 <설국>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시마무라는 두 여인을 만나게 된다. 눈으로 뒤덮인 고요한 정적 속에서 게이샤로 살아가는 고마코. 그녀는 붉은 장미처럼 오염하고 농담짙은 열정으로 시마무라의 마음에 들어온다. 또 한 명의 그녀는 수선화처럼 은은한 청순미를 지닌 요코. 시마무라는 두 여인의 상반되는 매력의 중심에서 정작 자신이 지닌 허상의 껍데기가 참으로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사랑에 시들어가는 고마코와 요코의 모습을 보면서 무상에 잠길 무렵이면 시마무라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망각하는 듯하다. 그녀는 누구, 나는 누구인가……

 

 

 

「자신도 모르게 늘 산골까지의 드넓은 자연을 상대로 고독하게 연습하는 것이 그녀의 습관이었던 탓에, 발목 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고독은 애수를 짓밟고 야성의 의지력을 품고 있었다. 다소 소질은 있다 하더라도 복잡한 곡을 악보로 독학해서 악보를 보지 않고서도 자유자재로 켤 수 있게 되기까지는 강한 의지로 노력을 거듭했음에 틀림없다. 시마무라에겐 덧없는 헛수고로 여겨지고 먼 동경이라고 애처로워도 지는 고마코의 삶의 자세가 그녀 자신에게는 가치로서 꿋꿋하게 발목 소리에 넘쳐나는 것이리라.」- 본문 중에서

 

적요로운 인간의 심리를 서정적인 필체로 아름답게 승화시킨 <설국>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한 남자, 시마무라'의 눈에 비친 설국을 해석하지 않았다. 글을 읽으면서 본의 아니게 그의 눈길과 발길을 따라가게 되었으나, 나도 눈의 고장에 진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사는 것이 그렇다. 보이지 않는 본질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 시마무라가 백지 상태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존재를 보다 선명히 인식하면서 무상무념의 상태에 도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남녀의 상징적 의미와 그들의 관점에서 시작된 삶의 투쟁을 보여주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 <설국> 나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언젠가 그들처럼, 나도 보이지 않던 본질과 마주하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운명적 조화를 섬세하게 표현했다는 느낌이다.

 

서정성이 농밀하게 스며든 눈의 고장, 그것은 인간의 정신이 이룩한 새로운 창조 세계는 아니었을까. 작가는 설국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은유적으로 관통해내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감미로운 가야금 연주곡을 들으면서 이 책을 읽는다면, 그 깊이 있는 동양의 미가 서린 작품의 진가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책 제목인 '설국'은 전체적인 흐름 속에 잔잔하게 깔려있는 인간의 표상과 같다. 상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거짓없는 진실로서, 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설국>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배경이 새하얀 눈처럼 정갈하고 풍부하다. 그에 반해 특별한 소재는 없다. 배경은 있되, 뚜렷히 드러나는 줄거리는 미묘하게 작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특한 이야기세계를 염탐하고 싶다면 생각을 조금 달리 해야 될 것 같다. 이 책은 감추어진 저자의 정신력과 본질을 대변하는 등장인물과 그를 둘러싼 배경이 지닌 상징성을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설상을 걷는 인간의 모습, 그토록 바라던 우리의 이상실현이 아닐까?

저자는 책의 전반부에서 시마무라를 거쳐서 이렇게 말한다.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고 말이다. 이 대목이 바로 <설국>이 지닌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여운이 길게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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