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성적 야망과 쾌락적 본능은 살아있다
때로 그것을 용납하지 않아 관대해질 수 없었던 세상이라야, 그것을 차단하여 맑고 순수한 것으로만 포장했던 것이다.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본능과 욕구가 자신을 표본으로 삼으라 했던 시절이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성적 일탈을 꿈꾸고,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기대하기도 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음탕한 상상과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혼자만의 방에서 온몸을 뜨겁게 달구면서 정적 낭만을 즐겼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도전임에도 우리는 그리 떳떳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본능의 표출은 비난받아야 마땅한 것이 아닌데, 세상은 도리와 기본이라는 틀에 본능을 가두어놓았던 것이다.
탐미적 평화주의자가 말하는 자신의 사상이란 무엇인가
언젠가 마광수의 《미친 말의 수기》를 읽어보았다. 사실 난 그가 어떤 시대에 어떤 존재로 평가받으면서 살아왔는지 모르는 입장이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하여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의 대표적인 시집으로 손꼽히는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읽으면서 마광수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가 다시 이루어졌다. 그의 작품은 은밀하고도 광적인 성적 충동성이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밑바닥에 깔려있는 자신의 실체를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반드시 읽어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마광수. 누군가 그를 더러 음탕하고 저속한 사상으로 문학에 오점을 남긴다 할지언정, 인간의 성(性)을 형상화하여 그 실존적 가치를 표현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반발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성(性)은 언제까지나 고결하여 찬미의 의미만을 지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광수라는 사람이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성(性)의 세계를 그 자체로 이해하고 경험해준다면, 그것이 그의 작품을 접하는 독자로서의 역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즐거운 권태와 감미로운 퇴폐미의 결합을 통한 관능적 상상력의 확장은 우리의 사고를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인류의 역사는 상상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꿈이 없는 현실은 무의미한 것이고 꿈과 현실은 분리되지 않는다. 꿈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적 실천을 가능케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시에서의 상상이 설사 '생산적 상상'이 아니라 '변태적 상상'이 된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시는 꿈이요, 환상이요, 상상의 카타르시스이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하는 행위조차 윤리나 도덕의 간섭을 받아야 한다면 우리의 삶은 정말로 초라하고 무기력해지고 말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시를 통해서 사랑의 배고픔과 사디스틱한 본능들을 대리배설 시키고, 또 그럼으로써 격노하는 본능과 위압적인 양심 사이에 평화로운 타협을 이루고 싶다.」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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