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우화
베르사유를 찾아온 라 퐁텐의 우화 속으로
1774년 5월,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한 여인이 토막 난 시체로 발견되었다. 여인의 두 팔은 십자가 모양으로, 그 위에는 새끼 양의 뼛조각이 쌓여있는 섬뜩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연상케 했다. 시체 옆에는 당시 루이 15세를 중심으로 구성된 국왕기밀체제의 수행원이었던 피에트로 앞으로 라 퐁텐 우화집과 편지가 놓여있었다. 자신을 우화작가라고 소개한 인물은 피에트로에게 열 개의 우화를 빗댄 살인을 예고했다. <여우와 황새>, <늑대와 새끼 양>, <황소만큼 커지고 싶어 하는 개구리>, <까마귀와 여우>, <사자와 쥐>, <자기 그림자에 속은 개>, <원숭이 왕>, <매미와 개미>, <토끼와 거북>, <늙은 사자>가 살인게임의 소재로 선정되었다.
우화작가는 상식을 파괴하는 비상한 두뇌력을 가진 소유자였다. 그는 루이 15세가 은밀히 운영해 온 국왕기밀체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수행원을 하나 둘 씩 살해, 또 자신의 정체와 계획을 눈치챈 무고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 살해당한 사람 모두 라 퐁텐의 우화를 암시하는 특징을 가졌다는 것이다. 우화작가는 루이 15세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왕권 교체 시기에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초특급 살인 파티를 계획한다. 바로 루이 16세 국왕 부부와 베르사유, 나아가 프랑스의 종말이었다. 허영과 낭비로 욕망충족의 시대를 영위한 루이 14세와 15세와는 달리 온화한 성품으로 프랑스의 새로운 희망이라 불렸던 루이 16세, 우화작가는 왜 그를 겨냥했던 것일까.
아르노 들랄랑드는 《단테의 신곡 살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이다. 그는 역사적 배경에 자신만의 개성적 문체와 속도감 있는 스토리 전개로 역사의 결정적 순간을 생생하게 재현, 그 속에 인간 군상의 희로애락, 아집, 삶에 대한 욕망을 풍자하기로 유명하다. 이번에 읽은 《피의 우화》는 라 퐁텐의 우화집에서 영감을 얻은 느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또한, 역사적 배경과 사건 그리고 인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돋보이기도 한다. 마치 그가 실제로 역사 속에서 환생한 인물이라는 착각마저 들게 하는 것이다.
「왕을 위해 준비된 왕관으로 온갖 흉내 내기를 한 끝에 원숭이가 동물들의 왕으로 뽑혔다. 이에 분개한 여우가 새로운 왕에게 자신이 발견한 보물을 가져갈 것을 청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물을 찾으러 간 원숭이 왕은 여우가 쳐놓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 이제 곧, 당신은 죽게 될 것이다. - 우화작가」p.311
루이15세와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우화작가
그는 자신의 출생에 얽힌 충격적인 비밀과 왕의 피가 온몸에 흐르고 있는 자신을 시궁창에 내던진 베르사유, 나아가 프랑스 전제에 대한 분노를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피의 우화》는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 독자의 숨통을 죄는 듯한 섬뜩한 사건 하나 하나로 치밀하게 짜여진 인간 군상의 우화집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라 퐁텐의 우화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풍자하여 인간의 이중성,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예리한 경고를 암시하는 《피의 우화》, 이 한 편의 소설집은 단순히 읽고 즐기는 것을 떠나서 읽고 즐기면서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과 방식을 배우는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라 퐁텐이 우화를 썼던 17세기, 그 우화가 온 세상을 피로 물들인 18세기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끝으로 책 속에 등장한 우화 중 인상적이었던 문구를 남겨본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에게 속으며 살아간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허상을 좇으며 미친 듯이 살아가는가! 그 사람들은 이솝이 들려준 어리석은 개의 이야기를 떠올렸더라면! 물속에 비친 먹이를 보고 욕심이 생겨 뛰어들어 죽을 뻔했던 개의 이야기를. 개가 뛰어들자 강물의 물살이 거칠어져 간신히 강가에 닿아 살아나긴 했지만 먹이의 그림자도, 자기 입에 물고 있던 먹이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자기 그림자에 속은 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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