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 겨울밤
이병주의 《마술사》를 해석하는 시간은 그의 글에 새겨진 어떤 정신의 발굴과 같은 것이다. 한 남자의 비운한 삶에 동참하게 된 것이 '나'라는 화자의 선택이자, 큰 결심이었다. 지리산 산록의 S라는 소읍에서 곤궁과 삶의 비애에 빠진 마술사 송인규를 만났고, 그를 돕는 과정에서 송인규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것이다. 송인규는 자신에게 마술을 가르쳐 준 스승, 크란파니와의 만남을 운명적이면서 기묘하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마술사》는 '마술'이라는 의도적이면서 목적이 독특한 행위에다가 인간의 기와 혈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송인규가 스승에게 마술을 배우기 위해 고도의 정신수련을 견뎌내는 장면, 동작 하나하나에 '나'라는 화자가 사라지고 '우리'는 송인규의 정신이 되어버린다.
「"마술사란 환각을 만들어 내는 술사입니다. 당신은 어머니에 대한 환각을 거의 완전하게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 힘으로 당신은 갖가지의 환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소지를 닦은 셈입니다. 그런데 마술사는 스스로가 환각을 만들어내는 것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p.65
현실에서 환영받지 못한 마술의 환영(幻影), 그것은 이병주의 체험과 독특한 상상력이 결합된 하나의 세계와 같았다. '나'를 납득시키기 위한 송인규의 마술력을 가장한 그로테스크적인 삶의 풍자였을까. '나'는 송인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의 청자는 이렇게 되묻는다. "그래 넌 마술을 봤느냐?" 몸에 만금을 지닌 자신과 송인규의 우연찮은 만남부터가 마술의 꼬임이 시작된 것이었으며, '나'가 송인규를 돕겠노라 만금을 기꺼이 베풀었음이 혹, 마술에 넘어간 것이 아니었던가. 《마술사》는 내가 해석하기로 인생사에 때로는 마술의 환각처럼 일어나는 기묘한 만남 그리고 그로 인한 통탄에 웃어넘길 삶의 순간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지독히 깊은 겨울밤에 시작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1974년 《문학사상》에 발표된 《겨울밤-어느 황제의 초상》 역시 이병주의 체험적 인생, 특히 감옥체험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에서 남북분단의 초입에까지 이어진 어느 황제의 회상은 이병주를 기록자, 목격자의 임무로까지 잡아당긴다.
「"바보스러워야 황제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리한 구석이 있어서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시대를 착오하면서도 시대를 앞지르고 있는 것처럼 환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낙천적이면서 염세적이고, 퓨리턴처럼 금욕적이면서 플레이 보이처럼 향락적이기도 한데 슬퍼도 슬픈 표정을 짓지 못하는 것은 희극 배우를 닮은 비극의 주인공인 까닭이다."」p.96
자기에의 경험과 목적으로 진술된 《겨울밤-어느 황제의 초상》은 《소설 알렉산드리아》에 실린 이병주의 사상을 점검하는 여백이 숨어있다. 기록하는 시인이냐, 기록하는 기록자냐를 두고 이병주에게 묻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역사의 중단, 후퇴를 이병주 식으로 진술하면서도 화자인 '나'는 이병주의 글을 옹호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았다. 역사의 한 부분을 거쳐간 역사인으로서 후세의 인간에게 역사를 생각하고 해석하는 하나의 관점과 방법을 제시하고 있음이 이 작품의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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