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마치면서
완벽을 추구했던 생각이 반으로 줄어들다.
나는 백의 절반과 절반을 찾아냈다.
이것은 하나의 시작이다.
창살 없는 유배지에서 보낸 50일의 기록, <서령의 50+50>을 완성하다.
주전자를 에워싼 불꽃이 한층 뜨겁게 타오르는 절정의 순간을 바라보았다. 애끓는 심정처럼 거칠은 거품을 터트리는 주전자 속에 담긴 물을 발견하고 나서야 불을 끌 수 있었다. 어느 정갈한 님의 손으로 다듬어진 작은 다관에 찻잎을 조금 넣는다. 그리고 물을 붓고 잠시 기다린 후에 다시 물을 비워낸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아본다. 반쯤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소슬바람이 불어와 나의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주전자를 향해 부채질하는 바람의 손짓…… 적당히 식은 물을 다관에 붓고 찻잎의 고유한 맛과 향이 우러나기를 기다린다. 그때야말로 나를 가득 채운 절반가량의 번뇌가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하여 남겨진 절반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생각한다. 왜 인간은, 백은 완성될 수 없는 것인가?
글을 쓰면서 두 개의 창문을 동시에 바라본다. 그리고 세상을 두 번 해석하고, 두 개의 의미를 찾아낸다.
<서령의 50+50>은 50일 동안 이루어진 나의 독백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매일 생각했다. 인간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존재다. 하여 우리는 완벽해지려고 노력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백의 절반이 곧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할당량이거늘, 백이라는 상징적인 숫자에 매료되어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외물을 소유하려고 하다니…… 절반의 진리에도 못 미치는 아둔한 자가 되어 정녕,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절반의 진리를 찾아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50일 동안 하루에 하나의 지혜와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서 내가 소진한 기력의 양과 무게는 고작 백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글을 쓰는 동안에 조금씩 나란 존재에 가까워지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나는 글을 쓰면서 생각했다. '나는 절반으로 충분한 사람이다. 나머지 공간은 그 자체로 하여 나를 가르치는 무언의 진리가 될 것이니……'
나는 다시 한번 <서령의 50+50>을 간략하게 다듬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내가 쓴 글을 대표하는, 글의 의미전달을 위한 상징적 단어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인용한 부분과 일맥상통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분석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다. 나는 처음 <서령의 50+50>을 쓰기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서령의 50+50은 상반되는 의미로 충돌할지도 모른다."(여는 글 중에서) 의도적으로 충돌을 피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의 글과 인용된 부분이 충돌하는 부분은 없었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나는 50일 전의 나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50일이 지난 지금의 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50과 50, 나와 세상의 결합을 위하여 글을 써왔던 모든 순간이 뜨거운 불꽃처럼 내 심장을 태우고 있다. 나는 그제야 찻잔을 채운 미묘한 물을 비워내고 다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결코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니, 백의 절반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간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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