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령의 기록/서령의 50+50

47. 나는 철학을 배운다고 말하지 않겠다.

글쓰는서령 2012. 5. 26. 06:12

 

인간이 진정으로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인간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싶어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인류 전체가 살갗이 투명해지는 쪽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킨다면,

자신들의 몸에 더욱 진지한 관심을 보이게 되지 않을까?

- 베르나르 베르베르 《나무》중에서

 

 

 

서령 : 그리 심오하게 생각하면서 살지 마라. 자고로 생명이란 때가 되면 나고 지는 것이거늘, 살아가는 동안만큼은 좀 편하게 지내다가 가면 안 될까. 왜 너는 생과 사에 얽매여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끝끝내 뿌리치지 못하는가. 그 누구도 너의 탄생과 죽음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니……

 

나는 관념의 의지를 묵살할 수 없다. 인간의 관념은 한계가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여 나는 매일 생각하고 글을 쓴다. 관념의 확장을 위한 것이다. 오늘은 나란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이 존재를 향한 나의 관념에 접근하고자 한다. 나는 일찍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면서 관념의 세계, 그 깊이와 넓이를 무한히 다루게 되었다.

 

앎을 향한 욕망이 곧 나의 존재를 결정한다. 누군가 그랬다. "우리는 진화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죠. 특히, 인간이 진화한다는 말은 꽤 역설적이고 바람직하지 않아요. 인간이 언제부터 점진적 속성을 지닌 존재였던가요." 모르겠다. 그때 당시에 이 말을 듣고 '도대체 저 사람 무슨 말을 하는 거지?'라고 생각했었다. 욕망은 인간을 끊임없이 자극하여 새로운 객체로 만들어낸다. 나는 인간이 욕망을 다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때나마 나는 인간은 배우면서 성장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배우지 않고 어찌 앎의 세계를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욕망을 알고 철학을 알고자, 나는 배우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나의 존립이 걸린 문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다. "모든 예술, 모든 교육은 단순히 자연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배우고 창조하는 것이 결국은 자연의 부속물이란 말이던가. 확장은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세계를 넓게, 깊게 파고드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진정으로 나를 살아있게 하는 건 앎이 주는 지적 쾌락과 성찰이 아니다. 나는 더이상 철학을 배운다고 말하지 않겠다. 철학은 배우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구의 철학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서 관념의 세계를 무한히 다루게 되었다고 했을지언정, 내가 그를 배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진 관념의 세계를 각성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이 나의 눈을 뜨게 하다. 그리고 나는 내 모든 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나의 관념에 따라 보고, 느끼고, 움직일 뿐…… 글을 쓰는 것도 그러하다. 나는 관념의 세계를 다루면서 그 느낌을 글로 쓰고 있다. 나 갈구하는 것이 있어 치열하게 창작의 고뇌에 빠진 것이 아니다. <서령의 50+50>은 백의 절반을 향한 나의 치열한 몸부림이다. 부림이 광적으로 난동하여 무엇으로 백을 충족할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백의 절반은 영원한 절반일 뿐이다. 나의 50, 그리고 또 하나의 50이 모여서 백을 이루는 것이지, 나의 50이 배로 불어나 백을 충족할 수는 없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백으로 완벽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절반으로 남겨진 인간에게 주어진 앎의 세계, 관념의 세계를 다루기 위해 살아갈 뿐이다. 인생은 배우는 것이나, 철학은 배우는 것이 아님을 안다. 나는 내 삶을 철학으로 논하고 싶지 않으나, 때로 본의 아니게 철학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발생하여 난감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존립이 걸린 문제이기에 하나의 사상을 뚜렷하게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싶어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지. 그러나 나는 인간임에도 그의 호언장담에 백의 이유로 동의하지 않는다. 절반의 이유만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