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령의 기록/서령의 50+50

38. 쓴맛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살린다

글쓰는서령 2012. 5. 17. 07:26

 

인내란 기다리는 것이며

기원하던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조급함이란 기다리지 못하고

앞질러 행동해서 바라던 것을 이루기도 전에

파괴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조급함이란 젊은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이란 발굽으로 마구간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뛰쳐 나가고 싶어하는 망아지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 그들의 독단적 생각으로 ──

밖에는 커다란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루이제 린저 《고독한 당신을 위하여》중에서)

 

 

 

서령 : 고통은 나를 아프게 할 수 없다. 나는 이미 고통 그 자체를 내 몸의 일부라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쓰라린 통증은 내 안의 가장 밑바닥에서 곪아 터진 상처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우리가 혀의 가장 안쪽자리에서 쓴맛을 느끼는 것과 같다. 보다 깊은 곳으로 침투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 쓰라린 통증과 쓴맛을 거부하는 것, 그래서 인간은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하여 보이는 것과 손에 잡히는 것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그 달콤함과 촉촉함에 매료되어버리는 것이다.

 

맛을 느끼는 혀의 경계가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혀의 미각 기능은 그러하다. 대게 단맛은 혀의 끝 부분, 쓴맛은 혀의 뿌리 부분에서 느껴진다. 끝 부분으로 살짝 접근하는 것에 익숙한 인간의 습성, 나는 이 부분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싶다. 달콤한 존재는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그러나 그 존재가 우리의 모든 것을 자극하진 않는다. 바로 우리의 인내심을 생략하고 탐욕만을 자극하는 것이다. 달콤한 존재는 선택의 여지가 필요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보다 신속하게 그것을 독차지하려고 한다.

 

달콤한 존재는 우리를 에워싼 충동적 욕구에 의해 생겨난 사막의 신기루와 같다. 신기루, 그것은 인간의 갈망으로 하여 생겨난 불가사의한 현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때로 누군가는 빛의 굴절에 의해 생겨난 미궁의 수수께끼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 불분명한 존재에 현혹되어 혀끝으로 탐닉하기 시작하여 제 존재를 망각해버리는 것이다. 쓴맛은 고통의 존재를 알려주는 직접적인 신호다. 우리에게 깊숙이 침투하여 쓰디쓴 뿌리를 내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통증에 격한 발작과 착란 상태를 일으키게끔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애써 쓴맛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쓴맛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살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먹거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인생의 쓴맛을 아는 자가 진정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있는 법… 나는 쓴맛이 우리의 인내심을 자극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쓴맛을 극복한 자야말로 자신의 인내심을 뛰어넘은 것이며, 나아가 그 어떤 고통이 찾아와도 굳건히 견뎌낼 수 있는 것……

 

나는 혀의 뿌리가 지닌 힘을 믿는다. 지금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의 맛에 집착하지 않겠노라며… 나는 생각한다. "쓴맛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살린다." 지금 내가 온몸으로 느끼는 쓰라린 고통이 곧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것임을 믿는다. 달콤한 사탕을 먹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달콤함의 행복은 단 몇 분 만에 사라진다는 것을. 사탕의 크기가 줄어들수록 달콤함도 함께 줄어든다는 것을. 그러나 쓴맛은 먹으면 먹을수록 그 쓴맛이 더욱 강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처음에는 도저히 먹을 수 없었는데, 계속 먹어보니까 괜찮은 것 같다." 쓴맛을 이겨낸 사람은 그 무엇을 하더라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것임을 믿는다. 나는 오늘도 쓰디쓴 고통을 온몸으로 삼켜내어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