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있으면 낮이 있게 마련이고,
일 년 중 밤의 길이는 낮의 길이와 같다.
어느 정도 어두움이 있어야 행복한 삶도 존재한다.
행복에 상응하는 슬픔이 부재하다면,
행복은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만다.
(카를 구스타프 융)
서령 : <서령의 50+50>을 시작하면서 적은 글이 있는데, 읽어보셨나요? 저는 그 글에서 백의 절반에 이르기 위한 의미로서, <서령의 50+50>을 적게 되었다고 했지요. 자세한 내용은 '여는 글'을 읽어보시면 될 거에요. 세상은 반과 반의 합이 모인 형상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낮과 밤, 위와 아래, 하늘과 땅, 음과 양… 이 밖에도 반과 반의 의미에 부합하는 이치가 많이 있겠지만요. 뭐 대충 이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치의 조화, 즉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 세상의 모든 절반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싶네요.
사회의 양극화 현상, 사람과 사물의 양면성, 이중적인 형태… 그 모든 것이 백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이겠죠. 사물과 사물, 사람과 사람의 대립이 존재하는 한, 진리를 향한 모순도 반드시 생겨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결정적 순간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와 하나의 통일인가요? 하나와 둘의 통일일까요? 조화를 이루려면 반드시 하나의 존재, 하나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우리가 공존한다는 것은, 모든 만물이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할까요. 공존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런 대답이 나오겠죠. 하나가 아닌 하나 이상의 것이 모여서 존재하는 현상이 곧 공존이라고 말이에요. 헌데, 공존을 안다는 사람이 삶의 조화와 균형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낮과 밤은 서로에게 공정하죠. 자신이 물러갈 시점을 어기는 법이 없죠. 하늘과 땅도 서로에게 공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만물의 조화와 균형의 시작은 곧 하늘과 땅의 공정성에서 출발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저는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고루 활용하는 사람, 대립하는 존재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대신, 그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하나가 오면 하나는 반드시 물러나는 것이 이치의 조화와 균형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이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하게 맞선다면, 결국에는 둘 다 파멸하고 말 거에요. 그렇지 않나요? 나의 불운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한들, 언젠가는 불운이 물러가고 행운이 찾아올 것임을 믿어요. 그래서 지금의 내가 괴롭다고 하여 인생이 끝난 것처럼 좌절하고 싶지 않아요. 이 삶의 조화와 균형을 위해서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절반의 고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곧 절반의 행복은 찾아올 테니깐요. 그러한 의미에서 <서령의 50+50>에 올리는 글은 참 특별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이 어우러진다는 것이 곧 공존의 시작이에요. 상반되는 현상과 존재가 나와 당신의 삶을 더욱 분명한 것으로 만들어주리라 믿어요. 융이 이렇게 말하잖아요. "밤이 있으면 낮이 있게 마련이고, 일 년 중 밤의 길이는 낮의 길이와 같다. 어느 정도 어두움이 있어야 행복한 삶도 존재한다." 이 세상의 모순 자체가 나와 당신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살아있게 하는 힘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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