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령의 기록/서령의 50+50

33. 이 삶에 확신이 존재하는 한… 나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글쓰는서령 2012. 5. 12. 00:53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 확신도 없이

사회적 관습에 따라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빈손인 것처럼 보이지만 확신이 있다.

……나는 옳았고, 지금도 옳고, 영원히 옳을 것이다.

-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중에서

 

 

 

서령 :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타인에게 너무나 쉽게 강요한다. "내 말 좀 들어봐. 무슨 말인지 알겠니?" 진정 나를 위한 충고라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얼토당토않은 말로 나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나는 그 모멸감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내 스스로 무덤을 파는 입장을 택할 것이며, 누군가 내 무덤을 대신 파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게 돌아오는 결과는 별반 차이가 없을지라도, 나는 나의 선택에 의한 결과라면 그 무엇이라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확신인가, 확률인가? 나는 이 두 가지에 대한 고민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문득 삶에 임하는 나의 모습이 도박꾼의 절박한 심정과 교묘하게 일치하는 순간을 발견하였다. 밑져야 본전이거늘,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확률에 모든 것을 걸고서, 나는 무엇을 그토록 갈망했던가. 나는 나름대로 나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필요한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정확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확신과 같은 것이었는데, 왜 나는 이 삶을 확률에 의존하려고 했을까.

 

믿음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믿음은 무엇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일까? 우리의 믿음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나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진다. 지금의 내가 살아있는 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럼 다시 이런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나는 누구를 믿는가? 그는 누구인가? 왜 그를 믿는가? 그것이 나의 확신인가? 확신은 인간을 살아있게 하는 힘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신을 향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제 삶의 곁다리와 같다. 겉으로만 맴도는 이방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확신을 주는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스스로 확신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에 더욱 주력해야 할 것이다. 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나라는 존재에서 과감히 벗어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와의 관계를 말끔히 정리한다는 것은… '나'는 이제 더이상 '너'를 구속하지 않을 것이며, '나'와 '너'의 존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함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에게 확신을 주는 존재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존재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존재는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 바로 이방인이다. 우리는 내 안에 존재하는 이방인을 맹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삶의 제삼자가 나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만큼 섬뜩한 것이 또 있을까.

 

결국은 나 자신을 향한 확신으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그 무엇을 믿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의 이방인을 위한 방을 만들어놓았다. 때로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것이 바로 내 삶의 제삼자, 이방인의 실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마음을 진지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마음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방인은 스스로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자신의 마음에 머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것은 확률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확신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