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의 미래는 오직 나만이 책임질 수 있다고
어떤 부모는 자식이 특별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재력이 부족하여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줄 수 없고, 어떤 부모는 자식이 싫다고 발버둥 치고 있음에도 부와 권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정성껏 가르치고 관리한다. 그래서 두 아이의 미래는 장차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 것인지, 우리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투자금액이 큰 상품이라야 제 몸값을 톡톡히 할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하기에 앞서 한창 성장기에 놓인 아이들 즉, 저마다 비슷한 처지와 시기에 놓인 아이들은 '수익률이 보장되는 상품'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능력 있는 교사가 제공하는 지식과 정보를 사들여 아이에게 주입하는 것을 더러 '교육'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들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바로 대가 없이 본능적으로 우러나는 부모의 사랑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 책을 읽기에 앞서 버트런드 러셀의 <러셀의 교육론>을 읽었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교육이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하던 찰나 생애 첫 스승이자 친구인 '부모와 자식' 즉, '부모의 교육'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치솟는 사교육비에 부모들의 등골이 서늘해진다는 '에듀푸어'라는 신조어, 이는 곧 수입에 비해 과다한 교육비 지출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부모들의 현실이다. 자식에게 보다 나은 교육환경을 제공해주고자, 자신의 처지와 능력을 벗어난 과욕이 부른 '지나친 사랑과 열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부모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장차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그렇다고 자식의 미래를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으로 돌릴 순 없다. 무엇보다 개인의 삶이 완성되기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스스로에 대한 신념'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이 지녀야 할 삶의 기본적인 토대를 닦아주되, 그것을 수시로 점검하여 갈고 닦아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이러한 원칙을 자녀 양육의 기본으로 세우면 좋을 것인데, 요즘 부모들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진 듯하다. 급변하는 사회와 맞물려 '교육의 양극화 현상'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부모들의 교육열도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왕이면 내 아이가 보다 좋은 학교, 직장을 다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월급의 절반을 자녀의 교육비에 투자하고, 궁궐처럼 커다란 집에 살아도 돈이 한 푼도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이유-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삶의 질,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자식의 미래'를 위해서 온종일 일에 치여사는 부모의 모습은 과연 칭찬받아 마땅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찬반논란이 크게 있으리라 생각된다. 어떤 사람은 '많이 배울수록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고, 어떤 사람은 '배운다는 것은 스스로 깨우쳐서 습득하는 것, 하여 많이 배운다고 그만한 지식을 지녔다고 볼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자식이 건강하게 성장하여 이 사회에 안정적인 뿌리를 내리게끔 도와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요, 부모라면 누구나 이러한 바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부분과 냉정해질 필요가 있는 부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음이 문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청년층 및 고령층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녀 교육비와 부대 비용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 희망 취업 연령은 72세라는 조사가 나왔다. 실제 퇴직 연령과는 19년이라는 차이가 난다. 특히 소프트웨어 기술직 같은 첨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퇴직 연령이 45세로 상당히 빠르다. 이럴 경우 경력 단절로 다른 일을 찾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 시간만큼의 생활 자금과 교육비는 고스란히 빚으로 남는다. (중간생략) 여기서 우리는 '꼭 자녀에게 고가의 과외를 시켜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고소득자가 아닌 이상,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비상식적 병리 현상은 '모 아니면 도'로 상대의 모든 것을 빼앗는 제로섬 게임일 수밖에 없다.」p.161
현실적으로 형편에 맞추어서 준비하는 '자녀 교육'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생이란 자체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인데, 내가 아닌 타인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것은 그 책임감에 짓눌려 힘겹고 고달프기만 하다. 내가 여기서 말한 타인은 부모가 바라보는 '자식'이다. 말인즉, 부모와 자식은 각자의 인생이 있는 것인데, 부모가 자식에게 지나친 개입을 시도하고 있음이 '에듀푸어'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에듀푸어>를 읽으면서 '능력있는 부모'와 '가능성이 풍부한 아이'의 모습이 하나로 겹쳐졌다가 다시 두 개의 형상으로 쪼개져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가 들렸다. "내가 빚을 내서라도 해줄게. 너는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해라.", "엄마, 저는 쉬고 싶어요. 더 이상 열심히 할 수가 없어요.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그들의 극닥적인 대화 속에 연민이 아닌 슬픔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이 책은 부모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각자의 인생이 장차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에 대한 점검을 하라고 당부한다. 평생 자식 뒷바라지에 매달리지 말 것이며, 이제는 부모 자신의 인생 후반전을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 빈곤층 300만 시대, 학벌지상주의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삶에 대한 애착이나 욕심이 없어서 마냥 태평하게 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말은 곧 자식에게 올인하지 않고 부모 자신의 인생을 즐긴다고 자식에 대한 애착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음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애정 표현의 차이'라고 볼 수 있고, 한편으로는 '가치관의 차이'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나아가 '자녀 양육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로 보면 될 것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부모는 자기 자신보다 '자식'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 개입이 점점 커지면서 '에듀푸어'의 기로에 갇힌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은 단순히 '에듀푸어'라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와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보다는, 근본적인 원인 점검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교육의 양극화 현상에 노출된 '교수자'와 '학습자' 즉, 부모와 교사 그리고 아이들을 사회심리학적 관점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에듀푸어'는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개인과 사회가 맞물려 발생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에듀푸어>는 자식 교육도 중요하되, 그보다 '부모의 노후'를 함께 준비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회 구조적 문제와 맞물린 '에듀푸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스친다.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아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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