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령의 기록/서령의 50+50

16. 누구를 위하여 진리는 존재하는가

글쓰는서령 2012. 4. 25. 09:07

 

타인에게 배운 진리는 그저 몸에 살짝 붙어 있지만,

스스로 발견한 진리는 몸의 일부가 된다.

(로랑 구넬)

 

 

 

 

서령 :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그 누구도 그대를 가르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당신이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기까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가.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정녕 그로 인해 당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확신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나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내가 적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 이야기는 바로 나의 삶이다. 내가 죽고 사는 것은 오직 나에게 달렸거늘, 그 누구에게 나의 삶과 목숨을 부탁할 수 있을까. 이치를 발견하여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내 것이 아니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스스로 그 필요성과 가치를 깨닫게 된 것이니, 굳이 외부의 압력이 없더라도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는데, 문제는 스스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스스로 배우지 않고, 외부에서 제공하는 정보만 수집하는 사람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최신정보를 신속하게 수집하는 것은 능력이라 불릴 만하다. 이 능력은 당사자의 민첩함을 받쳐주며, 나아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정확하게 찾아내는 사람임을 당당히 증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정보가 곧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정보이기에, 딱히 잘못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만 뛰어난 사람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는 정보를 직접 생산할 수는 없는 것인가?

 

여기서 내가 말하는 정보는 살아가는 데 필수적 요인이라 정의되는 정보가 아니다. 이 정보는 실질적인 혜택은 제공하지 못하나, 우리의 내적 영역에 깊숙이 침투하여 작용하는 정보다. 이것은 크게 말해서 삶의 지혜와 기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타인이 스스로 터득한 지혜를 내 것인 마냥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지혜이거늘,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설픈 흉내를 시작으로 삶 자체를 그럴싸하게 포장한다. 내 것이 아닌 것으로 삶을 완성하려는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례로 최근에 타인의 지식을 모방하고 인용하려다가 적발되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사람이 있었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은 제법 많았다. 심지어는 삶 자체를 위장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학력이나 자격증을 위조하는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이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닌 대상을 향한 집착과 욕망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깨끗이 승복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터인데, 끝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갈등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토록 원하던 모습을 갖추었을지라도, 과연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무슨 일이든 스스로 깨달아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절대 나의 것이 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니, 로랑 구넬의 말처럼 "타인에게 배운 진리는 그저 몸에 살짝 붙어 있지만, 스스로 발견한 진리는 몸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문장이 아닐까 싶다. 몸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곧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이니, 지금부터라도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 나다운 나를 위한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