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까지 75센티미터
누구나 사는 만큼 세상을 알고 사람을 아는 것 같다. 내가 오늘에 대한 글을 쓰자면 지금 이 순간까지 만난 인연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앉아 있을 것이다. 그가 누구였고 어디서 만났는지에 대하여 구구절절 나열하기 시작하겠지. 내가 사는 세상이 이만큼 발전했으니까 그에 걸맞은 현재 진행형으로 가득한 글을 적게 될 것이다. 가령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지만 살 만큼 살아본 사람이 써내려가는 글과 마주할 자신이 아직까지는 없는 게 사실이다. 나는 더 많이 살아봐야 한다. 이것도 부질없는 욕심인가? 좀 제대로 살아봐야 내가 쓰는 글이 제 빛을 발휘할 수 있으려나. 항상 그 생각뿐이다. 사연많은 사람이 글도 잘 쓴다고 하더라.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 생각해보면 굴곡진 삶을 등지고 살아온 사람의 입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일찍이 깨닫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걸어온 발자국이 지워질세라 한 편의 시와 소설로서 영원히 남기고 싶은 소망의 날갯짓을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자전적 소설이다.
이 책은 어릴 적 사고로 척추를 심하게 다쳐 하반신 마비가 되어버린 안학수 작가의 자전적 소설집이다.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수나는 이웃에 사는 친구 복성의 집에 놀러 가게 된다. 가난한 살림에 밥을 굶는 것이 예사가 되어버린 수나에게 복성의 형인 두성이 혼자서 먹고 있는 밥상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다. 두성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수나는 상에 올려진 옥수수에 손이 가는데……. 두성은 화가 치밀어 수나의 등에 우악스러운 발길질을 하고 만다.
「어머니는 수나의 등을 보고 놀라서 주저앉았다. "등이 왜 이런겨? 등이 아펐어?" 수나의 등뼈가 주먹만큼 솟아 올라와 있었다. 그동안 어깨가 구부정해도 먹지 않아 기운 없어서 그런 줄만 알았다. 어머니는 수나를 둘러업고 급한 김에 당숙에게 달려갔다. (중간생략) "허이구, 얘는 인저 병신 됐슈. 허이구! 어쩌면 좋댜." "뭔 소리래유? 병신이라뉴?" "어허 참…… 얘는 인저 꼽새 됐슈. 허이구, 어쩌냐……"」- 본문 중에서
곱사등이가 되어버린 수나의 삶은 불편한 몸처럼 순조롭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불편하게 만든 두성에 대한 원망으로 목숨을 끊어버리려 했던 수나. 하지만 비록 보잘것 없는 것이라도 자신의 삶을 버릴 순 없었기에 다시 일어선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조금씩 걷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까지 75센티미터>에는 작가 내면에 쌓인 응어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조금 다른 환경을 사는 주인공 수나를 통해서 차마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하던 수나를 챙겨주었던 담임선생님과의 만남은 책과 소통하는 기회를 열어주게 된다. 그 대목에서 저자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지 짐작하게 되었다. 물론, 저자가 실제로 겪은 상황과 다를지라도 그와 같은 인연이 분명히 찾아왔으리라. 나는 이 책을 어떤 마음으로 읽었는가.
「선생님은 여전히 수나에게 책을 읽혔다. "넌 무엇보다,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해." 어느 날 선생님이 곱게 포장한 선물을 코앞에 내밀었다. "이거 선물이다. 돌려주지 않아도 돼." 수나는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책 많이 읽고 씩씩한 사람이 돼야 해." 선생님은 수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도닥거렸다.」- 본문 중에서
주인공 수나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낭떠러지에 내던져진 삶이라 업신여기고 포기했다면 지금의 모습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일찍이 자신의 가능성에 한계를 두지 않고 도전하고 또 도전했던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보여준다. 우리가 처한 상황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삶의 가파른 언덕, 오르지 못하리라 장담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단호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인데,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다를지언정 그 본질만큼은 다를 수 없음을 알리고 싶은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켜서 그와 같은 이치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가족애가 진하게 우러나는 감동적인 소설책이다.
'서령의 서재 > 서령의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의 완성> (0) | 2011.07.08 |
---|---|
<아프니까 청춘이다> (0) | 2011.07.07 |
<풍경> (0) | 2011.07.06 |
<이외수의 감성사전> (0) | 2011.07.01 |
<흔들리는 마음 버리기> (0) | 2011.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