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령의 기록/서령의 50+50

26. 타인에게 인식되는 나의 모든 것에 집착하지 말 것

글쓰는서령 2012. 5. 5. 00:28

 

모든 사람들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어떤 사람일 것 같다'고 인식할 뿐이다.

(마키아벨리)

 

 

 

서령 : 사람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을 믿는다. 자신이 없는 공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 공간에 자신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사상과 대립되는 것은 믿지 않는다. 타인의 사상을 믿는 순간부터 나란 존재가 지닌 사상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타인의 사상을 인정한다는 것과 같아서 크게 부딪힐 염려가 없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살아간다. 그리하여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보이는 부분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도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진실이 무엇인지를 밝혀내지 못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실체를 정당하게 드러내지 않았으니, 그 누구도 그 사람의 실체를 알 수 없다. 하여 그 사람은 자신의 왜곡된 실체가 곧 진실이라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어떤 사람이 나의 형상을 떠올릴 때의 기준은 그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든 기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은 스스로 제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평가를 타인에게 맡기는 실수를 범한다. 나란 사람의 이미지, 그것은 결국 스스로 자처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쉽게 말해서 '내가 원하는 기준과 평가'를 타인에게 끊임없이 주입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진심을 몰라준다고 타인을 탓한다. 나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상대방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의도적인 말과 행동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 말과 행동이 곧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내가 보여주는 나의 외적인 요소의 조화를 통해서 나라는 사람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기준으로 나라는 사람을 하나의 형상으로 완성한다. 

 

때로는 보여주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의 가치관이 문제가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편파적 사고에 길들여진 사람의 경우에는 우리가 아무리 진실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들, 나와 당신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편파적 사고를 가진 사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다양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나란 사람의 존재도 다르게 해석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에 대한 평가를 달리한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나라는 사람을 알 수 없다.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어떤 사람일 것 같다."고 인식한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나에 대한 인식의 결과는 항상 정확하지 않다. 물론 열 사람 중에 절반이 넘는 사람이 같은 결과를 이야기한다면, 그 내용은 우리가 참고사항으로 기억해둘 필요는 있다.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고 했던가?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구속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타인에게 인식되는 나의 모든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인식되는 나의 모습도 중요하나, 그보다는 자기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점, 그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를 제대로 안다면, 절대로 타인의 평가에 쉽사리 동요하거나 기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내가 어떤 사람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 누구도 나와 당신을 쉽게 평가할 수 없다. 타인의 기준과 평가에 휘둘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