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멈추는 시간> : 달라질 수 있는 것이란 오직 나란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무게
이 삶을 마냥 정직하게 고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약간의 조미료가 들어가야 삶이 더욱 맛깔스럽게 드러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앞으로의 삶이 희망적이라 말할 수 있지만, 오늘의 내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개를 넘고 또 넘었는지 모르겠다. 위기의 순간이 닥칠 때마다 나는 '인내'와 '복종'의 사이에서 혼란감을 느끼곤 했었다. 두 단어는 얼핏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이 주는 시련에 대하여 '인내'로서 다스리는 것과 아예 '복종'하는 것은 극과 극이다. 이는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같을지라도 '나'라는 존재가 시련의 주체가 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에는 똑같은 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인내'를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시련에 굴하지 않는 당당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이 정도 쯤이야 나에겐 새털처럼 가벼운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 무엇에 굴하여 고개 숙인 자에게 어찌 '주도적인 삶'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시련을 잘게 쪼개서 얼굴에 바르고, 옷에 달고, 가방에도 넣고, 신발에도 달고 다녔다. 시련은 머릿속에 집어넣고 숨길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치유의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슬픔이 멈추는 시간>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성경 속에서 찾고 있다. 책은 우리에게 성경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저자는 심리분석연구원을 운영하면서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성경이나 불경 같은 종교 경전'이 큰 힘이 되어주고 있음에 주목했다고 말한다. 하여 종교와 심리학을 연결시켜서 '성경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인간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정신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스스로 주문을 외우거나 기도를 하는 행위와 비슷하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신을 신념의 힘으로 바로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굳이 종교 경전을 읽지 않더라도 이와 같은 행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명상을 하거나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두 눈과 두 귀가 열려있음은 '주위를 둘러보아라. 그리고 두 귀를 기울여서 듣고 또 들어라.'와 같은 암묵적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함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나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자기 자신을 인정한 사람은 그 어떤 시련도 당당히 이겨낼 수 있다. 세상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닌 '자신이 살고 있는 하나의 세계'를 통해서 자신의 참모습을 찾게 되는 것이다. 책은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모든 성숙한 종교들의 가르침은 서로 통한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절대 신의 존재를 믿는 교조적 기독교 교리나,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만을 믿는 교조적 불교의 입장과는 제 당돌한 생각들이 무척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강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종교적 심성은 가장 내밀한 사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특히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똑같은 설교를 듣고 똑같은 법회를 들어도 각자가 이해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종교를 갖고 있어도, 각자의 부처님과 하느님이 다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모두가 다 자기 보고 싶은 모습만 보는 것이니까요.」p.281
우리에게 펼쳐진 세상,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어디에
주어진 것에 족하여 살아도 늘 궁핍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 세상이다. 나는 만족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사람들은 부족하지 않냐고 물어본다. 내가 괜찮다고 말을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볼 뿐, 나를 도와주지는 않는다. 냉정함으로 가득찬 사회의 모습일지라도 이에 쉽게 좌절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매 순간 '신념'의 실체와 필요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무엇을, 누군가를 믿고 따른다는 것에 얼마나 큰 용기와 힘이 필요할 것인지, 나는 늘 궁금했다. 어느 날 갑자기 섬광처럼 나타난 책 한 권, 그림 한 폭, 노래가사 한 구절이 나의 신념을 툭 치고 지나갈때면 흠칫 놀라다가 깨닫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기 나름이라는데, 정작 나 자신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지도 의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리 아픈 구절은 과감히 건너뛰어버렸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몰라도 될 부분은 읽지 않았다. 그리고 종교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심신을 다스리는 사람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어떤 현상에 대한 설명을 하기에 앞서서, 언제나 자신의 신앙심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이야기했다. 믿음으로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말이다. <슬픔이 멈추는 시간>을 읽으면서 왜 '신념'이란 단어를 계속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결국, 이 책 역시 '인간의 신념'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본래 취지가 '종교와 심리학의 결합'이거늘, 마지막에 다다르니 이는 본래 서로 하나였음을-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