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령의 기록/서령의 50+50

30. 그대, 눈을 뜨고 나를 보라. 그리고 세상을 보라.

글쓰는서령 2012. 5. 9. 09:08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중에서

 

 

 

서령 : 카프카의 벌레와 서포 김만중의 양소유가 휩쓸고 간 자리가 공허하다.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렇게 눈먼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이 말한다. "당신은 괜찮아?" 실체에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조형물, 실속 없이 부풀려진 과대포장에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람만 꽉 찬 풍선이다. 날카로운 침으로 찌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인간은 산소 없이 살아갈 수 없거늘, 산소 그 자체를 눈으로 볼 수는 없다. 그저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산소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본질은 산소와 같은 것인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항상 우리의 곁에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본질인가? 누가 본질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눈먼 사람들이 말한다. "눈이 멀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기 마련이죠. 그게 바로……" 본질이란 말인가. "당신도 알고 있잖아. 인간을 살아있게 하는 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야."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맨 처음 눈이 멀었던 남자가 말한다. "눈이 보여! 눈이 보여!" 그는 미친 듯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외친다. "눈이 보여요!", "눈이 보여!" 그저 보인다는 것, 자신이 볼 수 있게 된 사실을 외치고 있을 뿐이다. 그 이상의 반전도 없거니와, 해피엔딩도 없다. 눈이 보인다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나는 언제 볼 수 있을까요?

 

눈이 보인다.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는가. 본래 볼 수 있다는 것은 눈을 통해서 가능한 것, 그러나 눈이 눈을 볼 수는 없는 것이거늘, 그렇다면 눈이 보인다는 것은 비로소 세상을 보게 되었다는 뜻인가? "나는 언제 볼 수 있을까요?" 그대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 주제 사라마구가 책을 통해서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우리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탐닉하기 위해서 초점을 맞추어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것에 접근하는 것은 까다롭다. 그것은 무모한 짓이다. 하여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을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언젠가는 그것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당신, 믿어라. 믿으면 보인다. 믿는 자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있다네." 그것은 본질인가. 눈 감은 세상은 암흑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 당장 그 착각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란다. 어쩌면 지금 눈 뜬 세상이야말로 지옥 같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