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나는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내가 사는 세상은……
매일같이 여행이다. 여행하는 고역이 있고,
기차 연결에 대한 걱정이 있고, 식사가 불규칙하고,
사람들이 항상 바뀌고, 그들과의 관계는
지속적일 수가 없으며 또 진실한 것일 수도 없다.
- 카프카의 《변신》중에서
서령 :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행위에 하나의 의미만을 부여할 수 없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것은 진부하다. 그렇게 시작되는 아침이 진부한 것이다. 눈을 뜨고 세상을 본다는 것은 자신의 무지로부터 깨어난 것이다.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나사가 반쯤 풀린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말한다. "꿈 깨라. 정신차리고 얼른 일어나."
자신의 세계에 갇힌 사람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살기 위해서 눈을 뜨는 것은 우리의 공동목표다. 그러나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목표달성을 위한 방법은 달라진다. 자신에게 익숙한 존재부터 찾아내는 사람은 평온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낯선 존재를 찾기 위해서 시야를 확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그는 기회주의를 옹호하는지도 모른다. 어제와는 다른 세상을 기대하면서 눈을 뜬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그 무엇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제의 세상도, 오늘의 세상도 마찬가지다. 그가 만나 온 사람들도 그러하다. 그는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항상 같은 세상과 같은 사람을 보면서 살아간다.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느낌에 사로잡혀 눈을 뜨는 사람도 있다. 분명히 세상은 달라졌다. 어제 만났던 사람이 오늘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사실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의식은 달라졌다. 그의 세상은 매일 새롭다. 그가 만나는 사람도 새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어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에 "이곳이 양 승상이 여덟 낭자들과 놀던 곳인데, 대승상의 부귀풍류와 여덟 낭자들의 절색의 미모도 이리 적막하도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이더냐?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가.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하나의 의미만을 부여할 수 없다고 했던가. 눈을 떴다고 그것이 마냥 현실을 좇기 위함은 아니지 않은가? 나에게 익숙한 것을 먼저 찾겠다는 결심이 곧 현실주의라면, 낯선 것을 찾아보겠다는 결심은 이상주의라고 보아야 하나.
카프카의 인물 그레고리는 눈을 떠보니, 자신이 벌레가 되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김만중의 인물 성진은 눈을 떠보니, 자신이 양소유라는 사람이 되어 세속적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레고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나, 성진은 육관대사로부터 추방당하여 양소유라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두 사람이 눈을 뜨는 행위는 동일했으나, 눈으로 목격한 세상은 극과 극이었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 위함이 곧 눈을 뜬다는 것이거늘… 한 사람은 생을 마감하고 한 사람은 깨달음을 통해 현실로 돌아왔다. 눈을 뜬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카프카의 벌레인가. 구운몽의 양소유인가. 혹 그레고리가 아니었을까. 그래도 나는 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세상이 달라질 수 없다면 내가 달라지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어제의 눈으로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진부하게 느껴진다. 나는 현실을 곡식의 낱알처럼 만든다. 현실을 쪼개어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서 제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하기에 이른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루 24시간, 그러나 시간의 가치도 낱알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항상 고정적인 형태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매일 새롭게 태어나듯, 나에게 주어진 하루도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는 존재가 되더라도, 나는 매일 새롭게 태어나기를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