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사고의 다양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가슴속에 책 만 권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 그림과 글씨가 된다.
(추사 김정희)
서령 :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빅브러더는 인간이 사용하는 어휘를 가능한 한 줄여서 단순화하려고 했다. 그것이 전체주의적 통치에 유리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사고의 단순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평소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대하여 생각해본다면 실제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는 그리 많지 않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특별히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닌 이상 풍부한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만큼 의사표현은 상투적인 어휘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투성에 익숙해지면 우리의 사고는 빅브러더의 의도처럼 단순하게 굳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그렇다면 사고의 단순화를 막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나는 말과 글의 관계성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말과 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이 분명하다.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나머지 하나마저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말과 글을 조리 있게 사용하기 위해서 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우리의 사고다. 아무리 좋은 말과 글을 사고에 주입시킬지언정, 그것을 사고가 올바로 해석하여 저장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고의 원활한 작용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보통의 방법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마련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구스타프 플로베르는 "하나의 사물을 나타내는 데는 단 하나의 단어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일물일어(一物一語)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것은 조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다. 하나의 사물과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단어 선택에 있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한 것인지는 몰라도 다양성이 공존하는 세상에 표현의 절제와 억압성을 내포하는 듯하여 이것이 혹 '사고의 단순화'를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고의 다양성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독서와 토론이 아닐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이 느낀 점에 대해서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이 과정이 반복되면 편협하고 단순한 사고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그 모든 것을 글로 적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 작업은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혼자만의 사고에 갇힐 우려가 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과 교류하면서 공동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사고의 다양성을 위해서 모인 사람들은 자연스레 풍부한 지식을 습득하기 마련이며, 사고의 무한한 확장을 몸소 체험하여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또는 시야의 폭이 확장되어 세상을 향한 이치를 꿰뚫는 통찰력이 절로 생겨난다. 이것은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말을 살찌우는 것이 글이라면, 말 역시 글을 살찌우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말과 글은 언제나 함께 작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에 생각한다는 것은 곧 사고의 연장선에 놓여진 것과 같다는 생각이다. 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여 다시 그것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