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부모는 미래를 돌보는 사람이다.
자식을 기르는 부모야말로 미래를 돌보는 사람이다.
자식들이 조금씩 나아짐으로써
인류의 미래는 조금씩 진보하기 때문이다.
(칸트)
서령 : 청소년 교육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부모 교육'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청소년을 독립된 주체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나, 그에 앞서 누구에 의해 주체는 완성될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부모라는 존재의 역할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은 부모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던가. 말인즉,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녀를 응석받이로 키울 것인지, 주관이 뚜렷하여 독립심이 강한 사람으로 키울 것인지는 전적으로 부모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리분별에 능숙하지 못한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부모의 양육방식이 미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이는 곧 자식의 미래는 부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이의 정체성과 가치관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태초에 아이가 만나게 되는 스승은 누구인가? 바로 부모라는 존재다. 부모는 아이에게 있어 최초의 스승이다.
그래서 칸트는 "자식을 기르는 부모야말로 미래를 돌보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미래를 돌보는 사람이라, 참으로 탁월하고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부모가 미래를 돌보되, 누구의 미래를 돌보느냐에 관한 것이다. 자식을 기르고 돌보되, 자식의 미래와 부모의 미래를 혼돈해서는 안되는 법. 하늘이 맺어준 관계인지라 부모와 자식 사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다. 그렇다고 일정한 시기가 찾아왔음에도 자식을 품 안에서 보내줄 생각을 하지 않는 부모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른바 '품 안의 자식'이라 했던가. 부모인 자신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가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착각이 빚어낸 안타까운 모습이다. 진정 자식의 미래를 생각하는 부모라면, 자식의 독립심을 길러주고, 자식을 위한 미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는 것이 현명하다. 자식의 존재를 '미래'라는 대주제로 확장하여, 부모의 양육방식에 접근한다는 것이 자칫 그 범위가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칸트의 "자식을 기르는 부모는 미래를 돌보는 사람"이라는 말이 영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한번 쯤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으리라. "나는 미래를 돌보는 사람이다."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