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전 외>
양반전 외
「"내가 그 돈을 가지고 부자가 되고자 하였다면, 백만 냥을 버리고 십만 냥만 남겼겠소? 그 돈은 그대가 그냥 가지시오. 대신 나는 이제부터 살림 걱정에서 벗어나고 싶으니 가끔 와서 우리집 살림이나 좀 돌봐 주시오. 내가 이제부터 그대를 믿겠으니 식구들이 굶지 않을 정도로 식량을 대어 주고, 헐벗지 않을 정도로 옷이나 마련해 준다면 고맙겠소. 일생을 그렇게 해 주면 나는 고맙고 만족할 것이오. 무엇 때문에 많은 재물을 쌓아 두고 그 재물 때문에 생기는 근심 걱정을 떠안고 살겠소?"」- 《양반전》중에서
조선 시대의 실학자이자 문장가인 연암 박지원의 단편 풍자 모음집 <양반전 외>
이 책에는 양반전, 허생전, 민옹전, 광문자전, 호질 이렇게 다섯 편이 수록되어 있다. 일례로 양반전만 하더라도 그 작품을 심도있게 다룬 책의 분량이 결코 적지 않겠으나, 두산동아에서 출간한 책은 중고등학생의 논술 대비용으로 핵심만을 간추려서 요약했기 때문에 연암 박지원의 작품세계를 진정 깊이 헤아리기에는 다소 부족한 면이 적지 않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체계적인 전개방식과 우리 옛이야기의 참된 맛을 아이들에게 널리 전하고자 감성적인 문체로 탈바꿈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연암 박지원은 조선 정조때 청나라를 여행하면서 보아온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세밀히 관찰하고 기록한 《열하일기》를 편찬했으며, 풍자와 해악을 넘나드는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며 다수의 한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바에 따르면, 사회의 폐쇄적인 성향, 양반 중심의 통치질서 그리고 양인과 천민의 엄격한 신분차이와 불평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풍자한 '양반전'만 보더라도 연암 박지원의 냉철한 판단력과 옳고 그름을 현명하게 바라볼 줄 아는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고질적인 풍습과 제도가 지닌 권력을 통해서 연암 박지원이 지닌 문제의식을 짐작하게 된다. 양반전은 몰락하는 양반의 위선적인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허생전은 기존의 틀에서 보다 확장된 사고로 현시대의 흐름에 능통한 허생을 등장시켜서 외국무역의 필요성을 암시함과 동시에 당시 사대부를 비판하고 있다. 또한 민옹전은 유능한 말솜씨와 재주를 가졌으나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무관 민옹을 중심으로 양반중심의 신분사회가 감추는 무능함의 극치를 가차없이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그 외에 광문자전과 호질 역시 하층민들의 삶을 통해서 지배계층을 풍자하고 있다. 책에 부록으로 실린 《예덕 선생전》은 지저분한 똥거름을 쳐내는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의 이야기다. 명분만 내세우는 속이 텅 빈 양반에 비해 비천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나, '선생'이라 불릴 만큼 훌륭한 인품을 지닌 엄행수를 두고 '예덕 선생'이라 높여 부르는 사람이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처한 현실을 비관하지 않고 매사에 충실히 임하면 언젠가는 그 빛을 알아보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올 것임을 확신토록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것, 물론 지금까지 내가 적은 내용은 나의 관점에 의한 해석이라서 보다 다양한 측면으로 분석하고 정의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논술대비용으로 씌여진 책이라고 하지만, 고전을 집중적으로 읽기에 시간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된다.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기를!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오. 나의 오른쪽 눈은 용이고, 왼쪽 눈은 호랑이라오. 게다가 혀 밑에는 도끼를 간식하고 있고, 꼬부라진 팔은 활같이 생겼다오. 마음을 좋게 먹으면 순수한 어린애 같지만, 마음을 나쁘게 먹으면 사나운 오랑캐같이 된다오.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물고 뜯어 해칠 수도 있지요. 그러므로 옛 성인의 말씀에 '자기를 이겨 내 예의를 차린다'는 말도 있고, '나쁜 마음을 막고 참된 마음을 가져야 한다.'라는 말도 있는 것이오. 그러니 자기 자신이 가장 두려운 것이 아니겠소?"」- 《민옹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