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버스 괴담>
심야버스괴담
「"나야 숙자. 낮에 시간 있어? 보고 싶어서. 응, 알았어." 숙자는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까만색 정장 투피스에 큼직한 숄더백을 맸다. 부엌으로 가서 싱크대 위에 놓인 우드 블록에서 긴 칼을 빼냈다. 세트를 살 때 함께 받은 나들이용 특수 칼집으로 칼날을 감싸 가방에 넣었다. 심호흡을 길게 하고 집을 나섰다.」- 본문 중에서
왜 하필이면 이 책을 읽던 날에 거친 빗줄기와 태풍이 휘몰아쳤는지. 더구나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끔찍한 망상에 시달렸다. 아주 오랜만에 심장이 급격히 팽창하고 진땀을 줄줄 흘리는 체험을 했다. 학창시절에 나는 시외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집에서 1시간 정도 소요되는 지점에 위치한 중고등학교. 방과 후에 다니던 학원을 마칠 무렵이면 막차를 타고 집에 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학원버스를 타고 안전하게 귀가하기도 했다. 가끔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날도 있었는데, 시간도 늦었지만 몇 명 안되는 사람들과 새까만 밤의 정적을 공유하며 집으로 향하는 상황이 꺼림칙하게 느껴지던 순간도 있었다.
이따금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아빠의 모습이 보이면 안도의 한숨이 내쉬기도 했는데…, 모두 지난날의 추억이다.
<카시오페아 공주>, <압구정 소년들>, <서울대 야구부의 영광>이라는 소설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재익 작가의 새로운 소설인 <심아버스 괴담>은 17년째 무사고와 안전운행으로 모범시민상을 받은 버스운전기사, 술에 잔뜩 취한 중년 남성 두 명, 앳돼 보이는 여대생, 평범해 보이는 가정주부와 긴 생머리의 아가씨 그리고 이 책의 화자인 준호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이들을 태운 버스는 분당에서 서울 양재동으로 이어진 도로를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광란의 질주를 감행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의문의 연쇄살인이 일어날 거라는 끔찍한 예측을 하지 못하고서 달리는 버스에 몸을 담고 있었는데…….
「이제 선미는 깨닫는다. 누군가 뒤에서 다가와 예리한 칼로 자신의 목을 찔렀음을. 성대와 식도까지 깊이 잘렸음을. 이제 다신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하리라. 죽음의 공포에 최대한으로 커진 동공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팔과 무릎 관절이 풀리면서 선미는 천천히 바닥으로 엎어졌다.」- 본문 중에서
이 책은 일정한 계단형으로 차근차근 진행된다. 버스 안에서 일어난 폭행사건으로 시작되는 돌연사, 그 순간에 같은 버스를 타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공범이 되어버린 등장인물들의 심리변화가 혼란스럽게 급속도로 퍼지면서 그들의 일상마저 암흑으로 물들여버린다. 책의 전체적인 흐름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았는데, 나름 꺼림칙한 장면을 연출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혼란과 안도감이 교차하게끔 유도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솔직히 이 책의 내용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우리가 괴담이라 불리는 이 짤막한 이야기 속에서 예의주시해야 할 것은 인간의 본성이 지닌 양면성의 유무다.
우리는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가 등장하면 가차 없이 짓밟거나 맞서기도 하고 도리어 겁에 질려 숨어다닌다. 혼자서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대상이라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처할 것이다. 그 대상이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질 수도 있으리라. 쫓고 쫓기는 숨 막히는 죽음의 질주, 심야버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냉혹한 희열로 둔갑한 칼날을 갈망한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한 여름밤의 달콤한 괴담 속으로 떠나보는 것도 제법 재미가 쏠쏠하다. 이제 당신도 이 버스에 올라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