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와 언덕지기 라이>
가이와 언덕지기 라이
인터넷이 발달하고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삶은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사람과의 소통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우리의 호기심과 욕구충족을 해소시키기 위한 다양한 네트워크망이 신설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정보가 손바닥 안에 자리한 휴대전화를 통해서 실시간 중계되고 있는 것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미니홈피 등을 통해서 다양한 사람과 관계 맺기를 하며 바쁜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사람들. 사람과 사람이 실제로 대면하여 친밀관계를 형성하는 소통의 장이 사라지는 듯하다. 여기 작은 언덕을 돌보며 살아가는 언덕지기 '라이'가 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에서 외로움이라는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언제나 똑같은 하루를 맞이하는 라이. 소통이 단절된 공간에서 하늘과 구름 그리고 바람, 시간을 벗 삼아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하늘은 드넓게 펼쳐져 있고 이따금 언덕 저 너머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그 곳, 다른 언덕의 향기가 실려 와요. 빈자리도 많아요. 여기 언덕과 구름 사이, 풀밭과 대지 사이……. 시간이라는 것도 있어요. 더디 흐르는 시간, 그 시간을 기다림이라 부르지요. 나는 이곳에 사는 언덕지기. 당신이 어느 언덕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언덕지기랍니다. 나는 여유롭게 나의 일상과 집 안의 좁은 구석들을 홀로 채워 가지요.」본문 중에서
<가이와 언덕지기 라이>는 벨기에 프랑드르 출신의 그림 그리는 작가, 클라스 베르플란케의 책이다. 이 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침묵과 고독감을 느낄 수 있도록 무거운 색감을 입힌 그림과 그에 어우러지는 글을 통해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소통의 장이 사라지는 세상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단절된 공간에 홀로 남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든다.
언덕지기 라이는 작은 씨앗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바람을 타고 온 씨앗인가, 누군가 살짝 남겨두고 간 씨앗인가. 라이는 짙은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흙을 파내어 씨앗을 묻는다. 그리고 물과 빵을 주기도 하고 시원한 그늘을 씨앗에 준다. 마치,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는 애틋함이 느껴지는 듯한 대목이다. 씨앗은 건강하게 성장하여 언덕을 뚫고 기다란 나무의 형상으로 라이에게 나타나는데…….
「가이가 있어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가이 옆에 있는 그 누군가가 된 거죠. 이런 것은 우리 언덕지기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랍니다.」p.25
기다림의 대상도 모른 채, 그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언덕지기 라이에게 나타난 가이.
혼자만의 공간을 낯선 이가 침범했다는 생각에 자신의 삶 자체가 달라졌다고 울부짖는 언덕지기 라이의 모습은 소통의 부재로 말미암아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암시하는 듯하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두렵게 느껴지는 세상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아침,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주기만 하던 가이가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너의 언덕에는 이야기가 가득해, 알고 있니? 내 뿌리는 그들의 속삭임을 듣는단다. 지렁이들이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 두더지들은 그것들을 받아 적어." 나는 그제야 돌아앉았습니다. "나에게 그 이야기 좀 들려주겠니?"」p.31
라이가 심은 씨앗은 소통이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다. 오래전부터 언덕 속에서 라이의 혼잣말을 묵묵히 들어주고 있었던 가이. 그제야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의 희망을 상징하는 가이에게 다가가게 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은 그렇게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있는 법. 때와 장소가 정해져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먼저 마음의 문을 연 사람이 다가가면 소통은 시작되는 것이다.
<가이와 언덕지기 라이>는 짧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속에 함축된 작가의 내면세계에서 시작되는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에 대한 묵직한 사색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저마다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고립된 생활을 자처하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을 해본다.